ㄴ.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17독립 보병연대가 은파산을 공격했다는 전황 속보가 있었고, “이어서 옹진반도의 두락산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정보로 이어졌다”고 한다.(그는 은파산 전황 속보를 수신한 시각과 두락산 전황 속보를 수신한 시각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이어서”라는 말로 뭉뚱그려놓았는데, 한국군 제17독립 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과 두락산 공격은 약 20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3) 1950년 6월 25일 오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해주 점령
ㄱ. 평양 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후 2시 30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했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북진하여 해주를 점령했으나, 평양라디오방송은 해주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는 않았다.)
ㄴ.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6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욕헤럴드 트리뷴>은 한국군 2개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고 각각 보도했다.
<이것은 해외 신문등을 찾아서 내가 직접 확인했다.>
ㄷ.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주일 영국대사관 소속 무관이 1950년 6월 27일 본국에 보낸 전문은 한국군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가 해주를 점령한 것은 우발적인 군사행동이 아니라 작전계획에 의거한 북진공격이었다.
원래 은파산, 두락산, 국사봉, 해주를 포괄하는 옹진지구는 1949년 4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 38도선 무력충돌이 치렬하게 벌어진 격전지였다. 당시 한국군 육군본부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언제나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요즘 많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보다 한국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이 더 많았다.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이 북진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무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사역사학자들인 볼꼬브스끼와 뻬뜨로바가 공동으로 집필하여 2000년 쌍끄뜨뻬쩨르부르그에서 발표한 논문 ‘조선에서의 전쟁에 대한 소비엣 관점(SovietViewoftheWarinKorea)'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병력과 화력에서 그 지구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보병대대 보다 더 강했다.
당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비록 전차와 자행포를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무장력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당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소련에서 생산된 T-34 중형 전차와 76mm 포를 탑재한 SU-76 자행포를 운용하였는데, 옹진지구에는 5대만 배치되었다.
한국군 제17독립연대는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에는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하여 해주를 점령했다. 그들의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1950년 6월25일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러면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어떻게 국지전으로 확대되었을까?
한국군의 공격을 받은 조선인민군은 옹진지구에서 반격전을 벌인 것은 물론, 개성지구에서도 전투에 돌입했다. 개성 북쪽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 남쪽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를 향해 포사격을 개시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한국군 제1보병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포성에 놀라 잠이 깬 시각은 6월 25일 오전 5시 30분경이었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가 개성을 점령한 시각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개성전투는 약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약 4시간 만에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지고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개성 시내로 진격해오자, 대리고는 너무 급해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자기 군용차를 몰고 개성 남쪽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본부로 피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옹진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날 조선인민군 제6사단제 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시작되어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확대된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6월 25일 국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한 사람은 미국 육군 군사연구소 실장이었던 로이 애플먼이다.
그는 1961년 미국 워싱턴에서 발행된 책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에서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무력충돌에 투입된 조선인민군 병력이 38,000명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38도선에 배치된 한국군 병력은 약 50,000명이었는데,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 병력은 175,000명이었는데,그 중에서 6월25일에 38,000명 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전면전이 아니라 반격전이자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은 지상공격기 일류신-10 93대를 실전배치했는데, 6월 25일에 지상공격기가 단 한 대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일류신-10은 23mm 기관포 2문이 장착되었고, 무유도 로켓탄 4발과 100kg짜리 폭탄 4발을 탑재하고, 시속 310km의 속도로 날아가는 지상공격기인데, T-34 전차보다 훨씬 더 강한 공격력을 가졌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25일에 전면전 계획에 따라 개전한것이 아니라,옹진지구 무력충돌이 확대된 것에 따라 국지전을 개시한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6.25전쟁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서 6월 23일 밤부터 6월 25일 새벽까지 계속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북진공격이 해주점령으로 이어지면서 38도선 다른 지역들에서 조선인민군의 반격전을 촉발시켰고, 그렇게 되어 격화된 국지적 내전으로 시작되었다.
6월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을 점령했다. 그때가 시간적으로 오전 9시에서 9시 30분쯤 이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국지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결론 : 이렇게 6월 23일로 일통하는데 이런 우연이 있겠습니까?
제 결론은 의외로 앞부분에서의 북측의 보도 내용이다. 그 내용이 핵심이고 제일 정확한 정답인것 같다.. 그래서 한번더 아래에 옮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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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통신 평양 26일] 남조선 괴뢰군이 25일 아침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이틀 전 황해도 벽성현(비포) 일대를 포격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습니다.
23일 22시부터 24일 4시까지 벽성현 다이동구(비청현 대동구) 일대에 총 105mm 곡사포와 81mm 박격포 20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23일 12시 25분부터 18시까지 벽성현 가좌구(비청현 치에쭈오구) 일대에 300여 발의 곡사포와 박격포를 발사했고, 24일 6시부터 10시까지 다시 가좌구(치에쭈오구)에 200여 발의 포를 발사했습니다.
괴뢰군이 광폭한 포격을 가한 결과 벽성현(비성현)의 농가 수십 채가 폭파되고 농민 13명이 부상당했으며 공화국의 경비대원은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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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작성하느라 실수가 많을수 있고 좀 두서가 없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다 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기밀해제된 자료들을 보면 북한은 6월 12일부터 6월 23일까지 38선에서 북쪽으로 10-15km 떨어진 전쟁 기반에 부대를 이동시겨서 군대를 모이게 성공했던건 여러모로 사실이었던것 같습니다. 장대한 야전 기동으로서의 병사들말이죠.
그리고 여기서 한 명의 중요한 북한군 고위장교 출신 '유성철'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비록 그가 북한정권을 미워하고 김일성 정권에 대해 안좋은 마인드로 북정권에 대해 팩트가 아닌 불리한 증언을 배제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참고는 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북한의 남침작전계획서의 작성과정에 대해서는 망명한 유성철 전 북한군 장군이 증언을 했는데,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의심스러운점도 있습니다.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이 소련 출신인 북한 장성들과 고위 장교들로 구성된 선발된 그룹은 강건 총참모장의 지시에 따라 작전 계획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고문들은 북한의 계획이 너무 단순하다며 러시아어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작전계획은 전투명령, 육해공군의 이동계획, 보급계획, 작전계획 등 4가지로 구성되죠.
다양한 부대의 전쟁 준비를 군사 훈련으로 위장하는 것. 이것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었죠. 유성철은 이 계획의 제목이 '선제타격 계획'이었다고 회고했는데 ' 그는 침략 계획이 서울 점령으로 끝났고, 나머지 남한 지역을 점령할 다른 계획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서울을 점령하는 것은 북한의 지도자들과 장군들 사이에서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대가 서울에 입성하면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유성철의 증언 중 일부 특징의 진위는 현재 포착된 북한 문서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소련의 군사고문들은 포스트니코프 총참모장의 지휘 아래 사단 전투명령 수준까지 작전계획을 작성했습니다. 1950년 7월 대전 인근에서 포획된 6월 22일자로 한국어로 번역된 잘 알려진 북한 제4사단의 전투 명령 1호는 러시아인이 그린 것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캡처된 문서인, 제3국경경비여단 6, 1, 4, 3, 2, 12사단 오토바이 연대에 배포된 일련의 정찰 지시서가 러시아어로 작성되었음을 확인할수 있는데. 사실 cumings(커밍스)는 이의 진위여부를 의심했죠. 조작된 문서라고 의심했는데. 이는 나름 이유는 있었조. 어쨋든 진위라고 하고 이 문서는 북한 총참모부 정보부장이 작전계획의 각 단계에서 정찰부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를 설정한 러시아어로 6월 20일 작성된 정찰지시서입니다. 어떤 학자나 전문가들의 글을보면 이런 명령서들이 위조된 이유등을 나름대로 샅샅이 밝힌 글들이 많은데 읽어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또 그렇다고 그 명령서들이 날조, 위조됐다고도 하기에도 확실한 증명이나 이유등도 어색하고 난해하고 논리적인것도 떨어집니다.
지금까지 공개된 소련의 기록 문서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최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전쟁에 대한 4단계 작전 계획이 담겨있긴 합니다. 이 계획이 언제 다시 그려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은 6월 21일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합의의 결과로 수정된 최종 계획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것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도 아쉬운점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아래의 글을 보면...
조선인민군의 반격 계획
남한군이 북한 영토를 공격한 후 조선인민군 사령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우리 육군은 항상 반격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배치 상태에서 행동을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조선인민군 부대들이 38도선 일대를 일제히 반격하도록 전환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지형 완화의 특성과 작전 전선의 상대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주요 공격을 계획하였다.
~~~ 이렇게 글이 시작됩니다. 즉 남측이 먼저 공격해서 북한군은 이에 반격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한의 많은 학자들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작성한거라 크게 의미를 두려 하지 않기도 하는데.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무래도 뭔가 찝찝하고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전쟁발발의 졀정적인 문서가 없습니다.
1950년 1월쯤 스탈린의 마음이 바뀐거는 맞는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50년 4월달인가 김일성과 스탈린의 회담에 대한 자료가 아예 없습니다. 폐기처리했는지 어쨌는지 결정적인 사료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담때 한국전쟁에 대한 말은 아예 없었다고 하죠.
그리고 또 하나. 유성철의 서울점령으로 전쟁을 마친다는 계획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미국이 간섭하면서 다시 남진하게 되지만 "라주바예프 보고" 문서를 보면 구체적인 계획은 서울점령으로 끝나는 것.그 이후의 글을 봐도 서울점령 이후의 글은 없습니다. 이또한 또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육이오 전쟁에 대한 저의 견해인데요. 6가지로 나누어서 보면.
(1).우선 저명한 베이징 대학교수인 김동길 교수님의 논서에, 전쟁시 유엔안보리(안보리)에서 스탈린이 기권한 실제이유의 문서발견으로(고트발트의 답변) 당시 실제 스탈린의 속내와 그리고 그의 음모를 알 수 있습니다.
(2).지금까지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이미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사실과 시점까지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비해 유엔결의안원서도 미리 작성했던 사실입니다.
(3).한국전쟁의 밑그림의 뼈대도 SL-17 이라는 문서도 작성 준비되어 있었으며 이는 실제로 전쟁의 순서,형식도 이 문서내용 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NSC-68 도 참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불과 한국전쟁 몇 칠전에 이 문서를 맥아더 및 고위 관료들과 청사등에 배포했다는 것.]
(4).그리고 지금까지도 고수되고 있는 소련의 스탈린은 전쟁발발시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매우 낮게 평가했던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거의 확실시 했다는점
(5).북한군이 서울 점령후 3일간 멈췄던 이유는 여태까지의 여러 설등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다른이유가 있었다는 것 _ 스탈린의 뜻
(6).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요구를 반대하다가 50년 1월쯤 찬성쪽으로 바뀐 이유가 여태까지의 설들과는 전혀 다른, 전혀 색다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 ~ 마오쩌둥이 소련에 왔을때 마오를 도청 한 다음 미국과 편먹겠다고 오해해서...
(7)미국은 중국과 적장한 선에서 맞붙기를 원했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남침 북침 떠나서~~ 미국과 소련의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는 겁니다.
*** 제 전체적인 글의 요지에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정치적인 성향이 있엇서가 아니라 그저 학문적인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k1k2k3i4@naver.com kyoungcham456@gmail.com
이왕이면 네이버 메일로~~^^
이쪽 메일로 답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래전 부터 국지전이 지속되다가
미소 양측이 남북한에 각각 대규모 균사력을 준비해서 발발된
강대국 대리전쟁이라 누가 선빵이냐는 의미가 없는
38선에서 다발적인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전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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