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전쟁의 시각..24편 시리즈
연재
국무장관 딘 애치슨
전쟁의 주요한 설계자들 중 한 명인 애치슨은 그 자신이 대영제국에 평생 감탄한 영국인 애호가였습니다. 급진 언론인 I. F. 스톤은 그가 "자유로운 미국 정신"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의 부패로 악취가 나는 낡고 주름잡으며 교활하고 잔인한" 것을 대표한다고 논평했습니다. 한국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를 거의 보이지 않은 애치슨은 한국은 "지역적인 상황이 아니라" "서방의 전체 권력 위치에 대한 전체 공산주의 통제 집단에 의한 추진의 spear(투창)인 지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침략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미국의 신뢰도와 국제 조약, 마셜 플랜, 나토와 관련된 국제 체제를 손상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이 포모사(대만), 인도차이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을 점령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증오하는 국내 고립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56,참고》 존 T. 맥나이, 애치슨과 제국: 미국 외교정책의 영국 억양
(컬럼비아: 미주리 대학 출판부, 2001);
로버트 L. 비스너, 딘 애치슨: 냉전 속의 삶
(뉴욕: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2006), 332;
펙, 워싱턴의 중국, 36살.
에치슨의 세계관은 아프리카에서 백인 소수자 지배의 영속화를 지지하고 남아프리카와 북로디지아의 백인 우월주의 지도자들(로이 웰렌스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19세기의 강대국 경쟁 시대에서 바로 벗어났습니다.
트루먼 정부의 초기 목표는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있어서 그 관점에서 방어적이었지만, 그들은 빠르게 북한군을 파괴하고 소련을 겸손하게 하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1950년 9월에 이승만 정권하의 통일 한국을 추진했습니다.
◇ 국내 정치와 전쟁에 대한 초당적 지지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한국에서 전쟁을 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대통령 임기 중 가장 힘든 결정 중 하나였으며 소위 뮌헨 패러다임을 언급하면서 히틀러를 달래던 세대의 실수를 재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고 썼습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후 미국의 동맹국들이 히틀러에 맞서지 못한 것). 이러한 역사적 비유는 냉전 초기의 정책적 사고를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역사 해석을 바탕으로 트루먼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 신속하고 강력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그는 당시에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던 제3차 세계 대전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1949년 소련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는 핵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미군의 지도자들도 우려했습니다. 루이 존슨 국방장관과 오마르 브래들리 육군참모총장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제한된 먼 곳에서 지상군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심지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도쿄의 보좌관들에게 "아시아 본토에서 미군과 교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유를 조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7] (그러나 전쟁에 참전한 맥아더 장군은 승리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의도였습니다.).
※《57,참고》 MacArthur(맥아더)는 Steel, Walter Lippmann and the American Century, 470(스틸, 월터 립만과 미국 세기, 470)에서 인용했습니다.
이상.. 2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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