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
대한민국의 등골에 빨대를 꽂고, 그것도 모자라 장기도 내다 판단다.
눈과 귀와 입은 병신이 된지 오래다.
모든 정부부처 수장과 부수장들도 병신에 사악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국짐이 위성정당 만들어 비례 빨아들이는 게 확률이 아닌 100%임을 뻔히 알고도,
"대의"라는 나이브한 소리를 처하고 앉아있는 것들이 있다.
목이 따지고 피를 뿜으면, 그 "대의"를 지킨 것이 목을 딴 것이다.
알았냐.
안중근 의사도 실수를 하셨다. 아, 실수라고 하고싶지 않다.
왜, 역시 나이브함이 동지를 도살당하게 했으니까... (아래 내용 참조하세요.)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3]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그 후, 이등박문 저격. 총살. 왜군들 놓아주지말고 다 죽였으면, 이등박문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폄하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 다만, 이런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민주당에 고언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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