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수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삼국사』는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고 기술한다. 고구려는 북경 동북쪽에서 건국하였고, 요양이 수도일 때 멸망하였다는 본고의 주장은 『삼국사』의 기술과 일치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구려가 압록강 중류에서 건국하였고 평양에서 멸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 되어 『삼국사』의 기술과 완전히 다르다. 홀본이 환인 오녀산성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들은 국내성이 집안 평지성이고 도읍지였다고 주장하나 『삼국사』는 국내성 축조가 342년이라 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국납(나라들=천안평야)에 있는 위나암성이 도읍지였고 국내성은 도읍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집안 산성자산성이 환도성이라 하나, 궁전지의 조성 연대가 빨라도 5세기라 스스로 주장하고 있어 그들 주장의 무근거성을 자인하고 있다. 집안이 환도성이라면 집안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가 설명되지 않는다. 조위는 환도성에서 북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관구검기공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관구검기공비 발견 위치로 환도성이 집안이라는 주장은 소설임이 드러났음에도 강단유사사학은 대중은 모르겠지 하면서 함구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동천왕이 평양(요양)으로 천도한 사실에 대해선, 그들 소설상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고 당시의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에 있으므로, 근거도 없는 갖가지 소설을 양산하여 그들이 소설가임을 공표하고 있다. 343년 집안이 실제로 고구려의 수도가 되자 그들은 이 때의 수도는 집안이 아니라는 코미디를 발산한다. 장안(금주)이 수도가 되자 이 때의 천도를 부인하기 위해 강단유사사학은 평양 신시가지설을 주장한다. 전술하였듯이 묘청의 난 진압과정으로 볼 때 고구려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님이 확실하므로 그들의 모든 주장은 소설도 되지 못한다. 고구려 수도에 관한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전부 거짓말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들은 오직 일제의 교시를 수호하고 고구려를 압록강 중상류의 소국으로 묶어놓기 위해 고구려의 수도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다. CE 14년 고구려가 현도군을 점령한 이래 북경은 고구려의 영토였고,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 이후 당하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중국 북동부 강역을 부인하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국 땅으로 만들기 위해 강단유사사학은 오늘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충성맹세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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