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폭우로 강물이 급격하게 불어나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안전 장비 하나 없이 사지로 장병들을 내몰았다.
그리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온 어느 한 가정의 귀한 아들이 그 과정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군인을 억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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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만기전역한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군대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구나를 느끼며
제가 겪었던 일을 써 볼까 합니다.
저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5X탄약대대 000 A.S.P 에서 2년+1주일을 복무하였습니다.
그 당시 복무기간을 2년으로 줄이는 과정에 입대를 하였기에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할수 있겠네요.
각설하고
저는 그때 전역을 약 3개월 앞둔 말년 고참이었습니다.
9월2일 전역날짜를 받아 놓은 상황에서
훈련이 없는 일과 근무 때는 예비군 동원 사격 훈련에서 나온 탄피를 타 부대에서 가지고 오면
바닥에 탄피를 깔고 그 수량을 체크 후 불출된 수량과 맞는지 확인 후 전산에 입력하는 것이 제 업무였죠.
물론 저는 그 당시 말년병장이었기에 부사수가 업무를 전담했고 저는 탄피보관창고에 짱 박혀 책이나 읽다가
심심하면 가끔 나와 부사수가 하는 업무를 도와주곤 했습니다.
사망사고가 일어난 그 날도 저에건 그저 그런 평범한 초 여름의 어느 하루였습니다.
마침 그 날 저녁7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위병조장 당직근무가 잡혀 있어서
탄약보급소의 다른 중대 인원들보단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중대로 1시간 일찍 중대막사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리고 샤워 후 병사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내무실로 돌아오니
마침 탄약보급소에서 남았던 인원들도 막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해 보여서 뭔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니
" O병장님, 방금 전에 위병소에서 낮 근무하던 4소대 OOO일병이 4중대 2돈반 카고에 치였습니다.
지금 대대 앰블런스 차량에 실어서 군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
" 아니 그냥 119를 부르지 산 넘어 있는 대대 앰블런스 불러서 도대체 언제 병원을 가냐? "
위병소에서 근처 시내까지 차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 산을 하나 넘고 한참 내려가야 있는
대대 앰블런스를 불렀다는게 그 당시 너무 어이 없어 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기억 나는 대로 대략적으로 그렸습니다. 근데 아마 거의 맞을겁니다.)
막사에 계속 머물다 보면 더 자세한 사고 상황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위병소 주간 조장 업무 교대를 해줘야 했기 때문에
야간 1번초 근무자들과 함께 위병소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위병소에 도착 했을 때 다른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위병소 사수가 열어주는 철문 바로 앞에 정말 새카만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그 새카만 피 웅덩이에 앉아 있던 수 많은 날파리들이 얼마나 빨갛던지..
함부로 사건 현장을 훼손할 수는 없었기에 사고 현장 주변 정리는 할수가 없었죠. 해서도 안되는거였구요.
그리고 2번초 근무자들로부터 000일병의 사망 소식과 함께 사고의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000 일병을 들이박은 2.5톤 카고는 대대에 위치한 4중대 소속으로 부식을 엄청나게 싣고 있었습니다.
1. 2.5톤 카고가 일반도로에서 위병소로 진입하는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고
2. 다리에 설치된 바리케이트를 모조리 피하며 닫혀 있던 위병소 철문으로 돌진
3. 카고석에 타고 있던 OOO 간부가 위병소를 향해 손으로 휘이휘이 저음
4. 철문을 열어 달라는 제스처로 생각한 000 일병이 철문을 열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000일병을 덮침
원래 원칙은
1. 위병소에 접근하는 차는 철문 앞에서 시동을 끄고 소속과 신분, 방문 목적을 밝힌 후
2. 위병소 사수가 신원을 확인 후 위병조장에 그 사실을 전달하고
3. 위병소를 출입하고자 하는 인원이 내부인일 경우 바로 철문 개방 또는 외부인일 경우 중대에 보고
4. 출입여부 확인 후 출입이 허가되면
5. 철문 개방
6. 위병소 조장은 출입사실을 출입명부에 기록
인데..
그 절차를 극도로 귀찮아 하거나 싫어하는 영내 간부들이 대다수라 내부 차량일 경우 차량 번호를
위병소 사수들이 숙지를 하고 있어 차량이 바리케이트를 통과하기 전에 이미 철문을 열어 놓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욕을 먹는 구조라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아마 000 일병 또한 접근하는 부식 카고가 4중대 소속이란걸 알았을 것이고 차량 조수석에 타고 있던 간부가
창문을 열고 손을 저었으니 000 일병 입장에선
" 야 ! 문 열어 " 라고 생각 했을 가능성이 200% 였을 겁니다.
만약 원래 절차대로 간부들이 위병소를 진출입 했더라면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돌진하는 차량 앞으로
위병소 문을 여는 인원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결국 사고는 벌어졌고 000 일병은 군 앰블런스 이송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사고 발생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현장 상황도 3번초 4번초 근무자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000 일병이 카고에 치이자 마자 탄약보급소에 있던 간부들이 죄다 다 튀어 나왔고
그 중에 중대 행정보급관도 있었습니다. 평소 무섭기로 소문난 간부였지만 또 그만큼 일을 철두철미 하게
잘하는 뭐 그런 참 군인 비슷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000일병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
" 디카~~ 디카~~ 디카 디카! 디카! 디카! 어딨어 디카 가져와! "
(나중에 중대 인원을 모아 놓고 그 당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왜 디카를 찾으러 다녔는가에
대한 의문에 "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다" 라고 말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자기가 무슨 의사인가 지 맘대로
사망선고하게)
하며 미친듯이 돌아 다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피 토하며 쓰러져있는 000 일병을 열심히 찍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입만 열면 평소 가족처럼 지내야 한다며 말하고 다니던
군무원들 단 한명도 000 일병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군가 000 일병을 차에 싣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소리쳤는데 차 시트에 피가 뭍을까봐?
혹은 무슨 이유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확실히 들었습니다.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자 대대 4중대에서 작업차 나와 있던 이등병 한명이 중국에서 의대를 다니다 왔었는데
그 인원이 뭔가 응급처치를 하려고 했었다라고 했습니다.
(사망사건이 일어나고 중대 분위기가 급속도로 나빠지자 중대장이 중대인원들 한 곳에 모아 놓고
사건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 왜 119를 부르지 않고 대대 앰블런스를 불렀느냐?" 라는
질문에 119에 신고를 했는데 군 영내에서 일어난 사고라 119가 출동을 하지 않으려 했다 라는 답변을
들은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 대답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대대 위병소를 통해 창원에 살고 계셨던 000 일병의 부모님께서 급하게 오셨다는 소식을
말번초 근무자를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4소대 인원들이 자고 있는 내무실에 들어가셔서 000 일병의 관물대를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위병소 당직조장 근무를 마치고 막사로 복귀한 저는 점심까지 오침을 했고 기상하자 마자
모든 중대인원은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간부들은 중대 인원 전원을 이끌고 위병소 앞으로 갔습니다.
그곳엔 사고를 낸 4중대 소속 운전병과 중사였던가.. 하사 였던가.. 초급 간부와 대대장과 000일병의 유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사건을 설명하는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 중대 인원 모두가 그곳으로 왜 불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가족들에게 어떤 압박을 줄 용도로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지만 기억 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 왜! 브레이크가 고장난 트럭이 돌진하고 있는데 우리 OOO이가 문을 열려고 나가는게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
왜 그 부분을 설명을 하지 못하냐?"
라며 울부짖던 유가족분들의 모습.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나의 비겁한 모습
우리 중대원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당시 유가족 앞에 서 있던 대대장이 취임하기 전
주간 위병소의 철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왜냐면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주위의 군부대에서 탄약을 불출하고 탄피를 반납하는 차량의
진출입이 아주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드나드는 차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위병소 철문을 열어 놓는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임대대장이 오면서부터 위병소 진출입 절차가 이전과 비교했을 때 까다로워졌지만
보안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이전과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짜피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간부들이 화를 내니깐요.. ㅋ
그 당시 바뀐게 있었다면 위병소 사수들이 철문을 수시로 열어야 한다는 것 그거 하나 바뀌었던 겁니다.
위병소 앞 유가족을 마주했던 대대장, 사고를 낸 운전병, 간부, 그 자리에 있었던 중대원 모두
000 일병이 왜 사고를 당해야만 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유가족분들만 모르고 있었을 뿐..
그래서 죄송합니다.
전역하고 난 뒤 000 일병의 싸이월드에 쪽지라도 보내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여차저차 잊은 듯 살았습니다.
물론 훗날 유가족 분들이 사고의 전말을 알고 계셨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조금이라도 일찍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점 너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000일병의 명복을 빕니다.
ooo일병님 부모님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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